2012년 05월 10일
독일 생활 제 2라운드!
정말 오랜만에 내 이글루에 글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남긴 게 새해 직후였나? 어느 새 4개월이 흘러갔는지 도무지 실감이 안 난다. 진짜로, 진실로 쉴 틈 없이 흘러갔던 4개월이었다.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던 4개월이었다. 하나 같이 내 독일유학 생활의 첫 머리에서 아주 중요한 것들 뿐이었다. 언제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말이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사람은 그 일을 잊어버린다. 설령 자기 자신의 삶이라 해도, 비록 그 일들이 불과 한두 달 전에 일어났던 것이었다 해도.
1월. 독일 대학들의 여름학기 지원 마감 시기가 1월 15일이었다. 당시 나는 B1 중반부를 배우고 있었다. 참고로 유럽 애들은 언어능력 수준을 측정하기 위한 공통의 틀을 만들어 두었다. A1 -> A2 -> B1 -> B2 -> C1 -> C2. A1가 완전 초보이고 C1~2는 현지 생활에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B2까지가 중간레벨. B1는 이제 막 조금씩 어려운 문법이나 어휘들, 듣기에 입문하는 단계다. 그리고 독일 대학들은 다 조금씩 입학 기준을 다르게 두고 있다. B1 수준에서 독일 대학들의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홈페이지들을 일일이 검색하고 해당 조건들을 조사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특히 나는 아직 여름학기에 바로 들어갈 어학수준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독일로 올 때 중급반 이후부턴 저렴한 대학부설어학원에서 배우겠다고 부모님과 약속했었기에, 무조건 어학코스를 제공하는 대학을 찾아야만 했다.
늘 그렇듯이 일은 생각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선 '대학부설어학원'이란 개념부터가 내 생각과 달랐다. 난 이것을 대학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어학원으로 간주했었다. 그러니까 해당 대학에 지원하는 것과 무관하게 돈과 의지만 있으면 해당 신청시기에 지원해서 수업을 들으면 되는 방식으로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알고보니 대부분의 대학부설어학원은 '학원'이 아니라 '어학준비코스'였다. 즉 어학원에 등록한 학생들을 자기 대학에서 공부할 예비 학생들로 전제하는 것이다. 아직 이 학생들의 어학실력이 부족하니 어학시험 준비반을 비교적 저렴하게 제공해주는 곳. 당연히 어학원생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해당 대학의 지원 학과에서 공부할 자격이 충분함을 입증해야만 한다. 사실상 일반 지원과 똑같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보자에겐, 특히 독일어 초보자에겐 아주 골치 아프다.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준비해야 하고 그걸 다시 관청해서 공증받아야 한다. 때로는 지원동기서나 이력서도 써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모두 조금씩 달라서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공증이란 개념도 한국과 좀 달라서 관청에서 해당 직원과 한 바탕 싸우기까지 했었다. 독일 와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다퉜었고 진심으로 화가 났었다. 근데 분노하니까 독일어가 평소보다 잘 나오더라. (...) 결국 사적인 공증사무소에 가서 공증을 받았고 돈을 참 많이 냈다. 부모님께 SOS를 신청해야만 했고 그렇게 죄송할 수가 없었다. 석사 코스는 지원동기서를 써야만 하는 곳들도 있어서 부족한 독일어로 A4 3장 반을 썼다. 그래도 이건 의외로 즐거웠다. 역시 난 뭔가 쓰는 걸 참 즐기나 보다라고 다시 생각했다. 물론 역시 참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압박감이 참 컸었다. 이래저래 시간을 많이 소모했고 덕분에 마감 시간을 맞추기가 참 빠듯했다. 그러고도 서류에 문제가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고 실망했었던가. 즉시 이메일을 다시 보내서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보고, 다행히도 마감 시간을 늦출 수 있었다. 독일인과 그렇게 이메일을 주고 받았던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게 모든 게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주위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없었다. 내 수준의 반에 있는 애들은 아직 대학지원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뒤 약 10일 간 참 마음을 조렸었다. 내가 원서를 최종적으로 냈던 대학들은 3군데. 부족한 시간 속에서 여러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곳들을 고른 결과였다. 그중 2군데에서 다행히 합격허가서가 왔다. 하나는 Jena(예나)에서, 하나는 Bamberg(밤베르크)에서. 조건은 전자가 더 좋았다. 어학원 자리만이 아니라 어학시험만 통과하면 바로 전공 공부까지 시작할 수 있다는 허가서였다. 거기에 기숙사 신청서까지 첨부해주었다. 반면 밤베르크는 좀더 협소한 조건이었다. 어학원 자리만이 보장되었고 전공 공부를 위해선 다시 지원해야만 했었다. 거기에 기숙사 신청서도 없었다. 대신 친절한 대학지원 및 기숙사 신청 안내서와 도시 지도를 첨부해 주었었다. 그리고 비록 전공 학과 지원을 다시 해야 해도, 이미 밤베르크 대학에서 내 기본적인 입학조건들을 승인한 상태라 독일어 시험만 통과하면 대학 합격엔 큰 문제가 없었다. 2군데 중 어디로 가느냐도 참 중요한 문제였다. 주변의 독일인들에게도 자문을 구했고, 한 친한 그리고 매우 친절한 독일인 노부부께서 밤베르크를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내심 밤베르크에서 한 번 머물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도시. 내 평생 이런 기회가 또 올지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래서 밤베르크에 등록했다. 수업은 4월 17일부터 석달 간. 그뒤에 다시 시험대비반에서 4주 간 수없을 들을 수 있다. 내 사설어학원의 마지막 수업은 3월 16일.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던 3월 이후의 미래가 조금은 분명하게 결정되었다. 그렇게.....간신히 한 가지 과제를 마쳤다.
대학부설어학원이 결정되고 잠시 그 독일인 부부, 그리고 그 부부의 집에서 하숙 중인 한국인 친구와 함께 잠시 여행을 갔다왔다. 내가 살고 있던 독일 남부의 보덴호수에서 멀찍이 떨어진 독일 동부의 작은 마을로. Bad Elster라는 자그마한 시골이었는데 지역에서 나는 물이 몸에 좋아 일종의 요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근데 나나 내 친구나 푹 요양할 정도로 돈과 시간이 넉넉할 리는 없었고, 그냥 우리는 그 친절한 부부와 처음 가는 곳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참 좋았다. 마을로 가는 길에 파손된 낡은 집들을 꽤 많이 보면서, '혹시 여기 구동독 지역인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통일이 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동서 간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바드 엘스터는 정말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여행 출발 전날에 처음으로 독일어 공식 시험을 치렀었다. TELC B1. 한국어로 하자면 텔크 B1 수준의 시험. TELC는 일종의 독일어 능력 평가 공식시험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앞으로 볼 다른 시험들을 위한 연습이란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 사실 B1 수준 자체는 나에겐 크게 어렵지 않았었는데, 문제는 대학지원 때문에 12월 내내 시달리느라 시험 준비를 거의 전혀 못했었다는 점이었다. 2월 초에 바로 시험 결과를 받았었는데 다행히도 성적이 매우 좋았다. 거의 최고 수준의 점수였다. 특히 독해와 쓰기, 말하기에서 아주 좋은 점수를 받았다. 문제는 듣기. 80점을 간신히 넘겼었다. 내 고질적인 문제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 약점을 명확히 파악한 것은 큰 수확이었고 앞으로 듣기에 특히 중점을 두고 공부할 계획을 세웠었다. 2월과 3월은 이 어학원에서의 내 마지막 기간. 화룡점정을 찍자! 라고 다짐했었다. 분명 그랬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당시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2월. 달 시작부터 아주 좋은 시험성적표를 받아서 즐겁게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대학부설어학원도 결정되었겠다 드디어 근 1달만에 다시 어학 공부에 충실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약 3주 간이 요 4개월 사이에 마지막으로 독일어에 전념했던 시기였다. 2월 18일 토요일. 어학원의 여행프로그램 때 알게 된 한 러시아 여자아이의 생일파티에 초대 받아 파티에 참석했었다. 예쁘고 착한 애였는데 내가 다니던 어학원에서 이전에 독일어를 잠시 배웠었고 지금은 이미 해당 지역의 대학생이었다. 그날 이 아이는 당연히? 평소보다 좀더 예쁜 옷을 입었었는데, 난 진심으로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꼈었다. 2월 20일, 독일에서 맞는 내 첫 생일. 재미있게도 지난 9월부터 같이 공부해왔던 우크레이나 친구 디마도 나와 생일이 같았다. 거기에 같이 자주 어울리던 다른 한국인 친구도 생일이 불과 이틀 전.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 3명은 어학원 내에서 인간관계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게 큰 파티는 우리 숙소에서 처음이었다. 많은 선물들을 받았고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외지에서 맞는 첫 생일이 이토록 즐겁고 행복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었다. 다음 날 학원에 가기란 참 힘들었었다. 숙취 때문에.;;; 지금도 기억나는 어학원 선생님의 그날 첫 마디. '수민, 나 오늘은 천천히 말해야만 할까? 아니면 두통이 심해서 힘들겠지?' '...아...괜찮...습니다...' 어느 새 추억거리다.
그 여자아이의 파티 참석 뒤 별 의도 없이 내 생각을 페이스북에 두루 적었었다. 그 아이와 무관하게 내 독일어 공부에 대한 단상이었다. 근데 그게 우연히도 하나의 시발점이 되어서 그 애와 많은 댓글을 주고 받았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썼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좋은 시작의 중대한 기초였던 듯하다. 아무튼 놀랍게도 그녀는 나와 한번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당시엔 그저 이전보다 더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마을에서 축제가 있었고 다른 어학원 학생들과 함께 그녀도 왔었다. 행진을 구경한 뒤 카페에서 쉴 때 그녀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내 숙소의 인터넷이 불안정해서 페이스북으로 연락하는 건 불안하니 영화를 보러 가려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근데 그 숙소의 유일한 단점은 정말 불안정한 인터넷이었다. 그러니까....그 이유는 진실이었다. 아, 물론 구실..이기도 했나...)
하지만 첫 시작은 영화관이 아니라 그 아이가 다니던 대학 견학이었다. 사실 그 대학, Konstanz(콘스탄츠) 대학은 12월~1월에 대학지원을 하면서 역시 염두에 두었던 곳이었다. 아쉽게도 독일어 강좌를 제공하지 않아서 당장 지원은 포기했었지만, 콘스탄츠 대학은 독일 내에서도 평가가 상당히 좋은 곳이었고 그 대학의 사회학과의 중심주제인 문화사회학은 내 관심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건 독일 대학의 견학이자 동시에 사회학 석사 과정 지원을 알아보기 위한 안내이기도 했다. 그녀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주었고 나는 당연히 기꺼이 승낙했다. 근데 이때만 해도 참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이제 겨우 B2 과정에서 배우고 있던 나와, 고국인 러시아의 대학에서도 독일어를 배웠었고 이미 독일의 대학에서 수학 중인 그녀는 독일어 실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실은 그 때문에 그녀를 처음 만났던 11월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학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대화는 참 잘 이루어졌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난 그녀의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중요한 건 대체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학을 잘 둘러본 뒤 난 그녀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했었다. 견학을 잘 해준 보답이라고 말이다. 독일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또 다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뒤로 나는 거의 항상 그 아이와 함께 어울렸다.
마침내 그 아이와 영화관에 갔다 왔다. 혹은 밤에 참 오래 같이 산책을 했다. 하루는 그 애가 자전거를 산다고 말했다. 나는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고 어학원 수업 후에 그녀가 찾아 왔다. 주말에 자전거를 같이 타자는 제안을 받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 우리는 놀랍게도 국경 근처의 나름 유명한 스위스의 한 마을까지 달렸었다. 화창한 날씨에 우리가 끼고 달렸던 보덴호수는 실로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어두워졌고 피곤했었기에 버스를 타고 왔다. 버스에서 나는 앞으로도 너와 자주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기꺼이 그러자고 답했다. 이어서 나는 약 2달 뒤에 밤베르크로 떠날 것임을 말해주었다. 사실 이 말을 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나는 그녀와 이미 잘 되고 싶었으니까. 참고로 밤베르크와 콘스탄츠는 기차로 약 6시간 떨어져 있다. 그녀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약간, 어쩌면 많이(?) 실망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말하길, 내 고백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단다.
3월. 드디어 슬슬 따뜻해지기 시작한 시기. 2월 마지막 주인가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방문했다. 1주일 간 머무를 것이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난 그럼 그녀를 1주일 동안 못보리라 생각했었다. 그 애 또한 그렇게 여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자기 부모님과 이제부터 대학에 갈 건데 함께 가겠냐는 제안이 왔다. 그녀의 부모님은 러시아어만 할 줄 알았고 이 구성은 절대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통역이 없다면 나는 그분들과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즐거웠고 나는 그뒤로도 두 차례 더 그 가족과 어울렸다. 심지어 스위스의 루체른까지 같이 다녀왔다.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나는 이때 그분들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주었었단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루체른에 다녀온 뒤 바로 어학원의 다른 친구 2명과 뮌헨으로 잠시 여행을 갔었다. 이미 가기로 예정했던 여행. 늘 함께 잘 돌아다녔던 한국인 친구 - 그러나 늘 짧은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 기종씨와 우크레이나 친구 디마와 함께였다. 이때 나는 아마 이번 여행이 이들과 함께 할 마지막 여행 - 적어도 상당히 오랫 동안은 - 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약 1년 여 만에 다시 찾아 간 뮌헨은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지난 6개월 간 참으로 작은 도시에서 머물다 보니 유독 뮌헨(이제는 뮌쉔...이 더 익숙하긴 하다;)은 더 크게 느껴졌다. 마리엔광장, BMW 박물관, 호프브로이 하우스. 우린 모든 것을 즐겼다. 뮌헨에서 이틀을 머문 뒤 우리는 밤베르크에 잠시 들렸었다. 사실 내가 뮌헨 여행에 합류한 것은 밤베르크에 한 번 가보기 위해서였다. 뮌헨과 밤베르크는 둘 다 바이에른주에 속한 도시이므로. 늘 듣던 대로 참 예쁜 도시였다. 그 사이에 그 아이의 부모님은 러시아로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며칠이 내가 밤베르크로 오기 전까지 나와 그녀가 함께 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간이었다.
3월 16일. 드디어 약 6개월 간 독일어를 배웠던 어학원에서의 내 수강 기간이 끝났다. 그냥 하나의 사설 어학원일 따름이고 6개월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웬지 졸업하는 느낌이었다. 아마 처음으로 먼 타지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한 곳이어서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많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 사귄 모든 친구들이 그립다. 하지만 내 밤베르크에서의 수업 시작은 4월 17일. 아직 1달의 시간이 있었다. 사실 좀더 일찍 해당 도시로 이동해서 방을 찾고 계약하는 게 순리였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최대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확신이 있었어도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확인하기란 역시 좀 긴장되는 일이었다. 3월 23일에 여행차 갔었던 하이델베르크에서 모든 게 완전히 분명해졌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고도, 하이델베르크.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이다. 다른 계절, 다른 풍경과 함께.
4월. 4일에 대학부설어학원 수준평가시험이 있었다. 시험 결과에 따라 반 편성을 받는데 이번 겨울학기 시작 전에 어학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선 가장 높은 반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했다. 다행히 시험 결과가 매우 좋았고 지금은 바로 그 상급반에서 배우고 있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약 1달 만에 다시 밤베르크까지 갔다. 봄을 맞이한 이 작은 도시는 믿기 힘들 정도로 예뻤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뒤 보기로 했던 방 두 군데를 방문했었다. 독일에서 학생 신분으로 저렴하면서 그럭저럭 살만한 방을 얻기 위해선 꽤 고생해야 한다. 보통 이런 방들은 한 집을 학생 여러 명이서 쓰면서 집세를 분담하는 형태인데, 이미 그 집에서 살고 있는 학생들이 방이 비면 광고를 내고 그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 본 뒤 누구와 같이 살지 자신들이 정하는 방식이다. 보통 광고에 나이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로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을 원한다. 동시에 늘 써 있는 말은 '단순히 같이 사는 걸 넘어서 서로 관심을 두고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란 것. 결국 숙소 방문은 일종의 면접과도 비슷한데 그렇게 딱딱하거나 복잡하진 않지만, 실제로 방을 구하는 입장에선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당연히 이것은 나처럼 독일어가 짧은 외국인, 그것도 아시아인에게 특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점은 심지어 독일 학생들조차 학기 시작 전에 밤베르크처럼 작은 도시에서 방을 구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란 사실이었다. 그렇게 약 1달에 걸친 나의 방 구하기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월 14일. 드디어 밤베르크로 떠나는 날이 왔다. 이미 전날 기존에 머물던 숙소의 방과는 계약이 끝났었다. 관리인에게 열쇠를 돌려주고 보증금을 받고 친구들과 작별하니 독일에서 처음으로 살게 되었던 곳을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심지어 자주 들르던 캐밥집의 주방장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와 역에서 헤어지고 아무 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밤베르크로 출발했다. 독일어 강좌 자리는 있되 도시에서 살 집이 없었다. 일단 예약한 호스텔로 갔다. 여행이 아니라 살기 위해 호스텔에 묶은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도 성수기도 아닌데 자리가 별로 없어서 며칠 뒤에 나가게 될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이때부터 매일 방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 신문, 대학게시판의 모든 광고들을 둘러보았다. 가격, 위치, 인터넷, 가구 구비 여부 등 모든 조건들을 검토하고 다시 연락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나마도 수없이 보낸 이메일 중에서 '그럼 한 번 방을 보러 와' 하고 답변이 오는 것은 10개 중 1개 꼴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아예 아무 답변도 없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방을 보러 가면 거의 항상 다른 독일 학생들도 같이 왔다. 늘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독일어 선생님한테 방을 찾고 있다고 하니까, '이 시기에 여기서 학생들이 방 찾기란 정말로 어렵다'고 했다. 실은 독일 학생들조차 그러했다. 호스텔에서 만난 독일 학생 몇몇도 방을 못 구해서 호스텔에 머물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메일을 보내고 답변을 기다리고 때로는 의사소통이 더 힘든 전화도 하고 그렇게 힘들게 '면접 일정'을 잡아서 낯선 주소의 집을 찾아갔다. 그나마 시내에 있으면 다행이지, 근교의 작은 마을에 있는 집들은 정말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호스텔. 새로운 독일어 수업은 이미 시작했지만 도저히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늘 오늘 답변인 '미안하지만 다른 곳을 찾기 바랍니다'. 볼 때마다 참 힘이 빠지는 말이었다.
날씨가 좋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가는 길에 한 광고를 보았다. 학생용 아파트를 세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당 주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사실상 부동산에서 내놓은 물건이라 당연히 좀더 비쌌다. 절대적으로 다른 숙소들보다 비싼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비용이 높은 축이었다. 방세는 그렇다 쳐도 보증금이 일반적인 학생들 숙소보다 500유로 이상 비쌌다. 물론 보증금이기 때문에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긴 했지만 갑자기 큰 현금을 마련하는 건 참 부담이었다. 다시 한번 부모님께 긴급 연락을 드렸다. 이럴 때마다 참 죄송하다. 하지만 내가 방을 구하기로 정해 두었던 마지노선은 4월 30일. 5월부터는 밤베르크에 완전히 정착해서 독일어 공부에 전념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답변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숙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들에서조차 거절 당하면? 더 이상 숙소가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아파트 원룸조차 불확실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에 중개업자들은 내가 어떻게 재정보증을 할지에 대해 난감해했다. 보통 독일애들은 부모님이 와서 보증을 해주니까 말이다. 미봉책으로 내 아버지가 영어로 이메일을 쓰는 것을 일종의 보증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급히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이메일은 내가 썼다. 영어로 공식 이메일을 쓰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싶다. 모든 것을 명확히 하고 마침내 방 키를 받았을 때, 밤베르크로 온 이래 처음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또 다시 불안정한 미래가 아주 잠시나마 한 부분에 있어선 확실해졌다.
방을 얻은 뒤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 또 한 바탕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버스비를 아낀다고 걸어서 40분의 거리를 3번 짐을 들고 왕복했다. 그리고 다른 가구는 다 완비되어 있었는데 오직 이불이 없었다. 이사 첫날엔 이미 늦어서 가게들도 다 닫았었기에 이불 없이 잤다. 날도 많이 따뜻해졌고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그리고 바로 감기에 걸려서 약 2주 간 고생했다. 이 불청객은 어제 비로소 거의 떠나갔다. 가구는 있되 살림도구는 전혀 없었기에 이불, 식기, 청소도구, 요리도구 등을 샀다. 정돈하고 청소하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이전에 살던 마을에서 부쳤던 소포는 언제 오나 사람을 노심초사하게 만들더니, 알고보니 이 택배업자들이 소포를 다른 데 맡기고 갔었다. 다행히 일종의 관리실 같은 데라 잘 찾을 수 있었지만 그게 4일 전이었고 나에겐 아무런 통보도 없었다. 이것 때문에 불안해서 관련 사이트를 뒤지고 질문하고 가게에 전화하고, 얼마나 불안했던지. 거기엔 내 중요한 대학관련 서류들이 다 들어있어서 만약 소포 분실 시엔 대학 지원에 큰 지장이 생길 판국이었다.
이제 모든 게 정리되었다. 나만의 방이 생겼고 살림도구들도 장만했고 쓰레기 취급 방법이나 분리수거도 익혔으며 약간 불편하지만 인터넷도 된다. 오직 돈만이 문제인데 그 유일한 문제가 참 압박감이 크다. 이사 때문에 쓴 돈도 상당하거니와 앞으로 치를 독일어 시험도 상당히 시험비가 비싸다. 대체로 110 ~ 140유로 사이. 여기에 교통비까지 생각하면 이미 20만원 이상이다. 어제 어버이날이라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도저히 어버이날에 시험료로 돈 더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있는 돈을 쪼개서 시험료를 제하니까 정말 돈이 달랑달랑하다. 1주일 뒤에 그녀가 놀러 오는데 과연 잘 맞이해줄 수 있을지 걱정일 정도로 빠듯하다. 머리가 너무 길어져서 이발은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그마저도 지금은 불투명한 상황.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다. 모든 게 늘 불안정하다. 당장 몇 달 뒤 내가 어디서 살게 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특히 밤베르크로 이사온 후로는 모든 걸 혼자 처리해야 했기에 압박감이 상당했다. 밤베르크라는 손꼽히는 아름다운 관광명소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구경해본 날이 없다. 한 가지 깨달은 건 유학생활의 낭만 운운하는 일은 돈 많고 정말 여유있는 형편의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사치란 점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내 생활이 무미건조하고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어찌 보면 나 역시 꽤 해외 생활의 낭만을 즐겨 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맘 편하게 있었던 날은 참 드물었다. 특히 밤베르크에선. 친구 한 명 없는 이곳에서 오직 시험을 위해 앞으로 몇 달을 있어야 한다. 한국이라고, 고국이라고 마음 편히 늘 있을 수 있겠냐마는, 특히 혹독한 한국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 선후배들을 보면 그런 생각 역시 환상임을 잘 알지만, 여기서의 불안은 조금 다른 것이다. 뭔가 확실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강제로 돌아가야 한다. 나 같은 어학생 신분에게 그 조건은 당장 몇 달 뒤의 어학 시험이고 그 뒤엔 또 대학 졸업이 걸린 시험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사용처럼 한국에선 당연하고 쉬운 일조차 맘 편히 처리하기 힘들다. 사용 요건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게 비교적 신조어이고 새로운 조합어랑 사전에서 찾을 수 없을 때의 불안감. 뭔가 나를 최종적으로 받쳐 주는 게 전혀 없다는, 그래서 모든 걸 스스로 처리하든가 아니면 한국으로 가든가 둘 중의 하나라는 압박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 이곳으로 온 선택에 후회는 전혀 없다. 독일어의 기본을 배웠고 이제 새로운 언어를 조금이나마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독일어 역시 아름다운 표현들과 단어들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독일 현지에서 그들의 문화를 더욱 살갑게 체험할 수 있다. 이전에 잠시 뮌헨에 여행갔을 때는 식당에서 음식 하나 고르는 것도 어려웠고 뭐가 뭔지 알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런 전통 식당에 가도 마음에 드는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고 소중한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지금의 여자친구는 정말 분에 넘치는 행복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부족한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나를 이렇게나 잘 이해해주고, 한 치 앞의 미래조차 불안정한 나를 이토록 완전히 신뢰해주는 사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독일에서 러시아 여자아이와 한국남자의 조합. 그나마 일반적인 조합인 서양 남자와 아시아 여성과도 정반대인 경우라 우리는 어딜 가든 모종의 시선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니 더욱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자. 독일에서 처음으로 맞게 될 여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고 싶다.
(앞으로 종종 이런 글을 남기기엔 어려울 듯해서....길게.......한 번에........다 썼다. 한국어로 글 쓰는 것에 대한 갈증도 조금은 풀린 듯하다.)
# by | 2012/05/10 08:14 | 나의 세계 | 트랙백 | 덧글(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