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무서운 사람


무서운 사람. '죄와 벌'을 보고 새삼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감탄한다. 최근 들어 아무리 와우를 즐겼다 해도,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해도, 재미있는 만화를 봤다 해도 나의 마음에 가장 강렬하게 와닿은 것은 그의 '죄와 벌'이었다.

 

원래 이 책은 수능 직후에 읽었던 것이지만 훈련 받으면서 유독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최근 들어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인간은 정말 믿을 만한 존재인가? 진보를 향한 거대한 기획 중 대부분이 좌절하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지금, 나는 무엇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꿀까? 사실 이런 질문은 철학이나 학문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거창한 말로 포장한다 해도 결국 진보를 지향하는 모든 이론과 사상의 바탕은 순진하기까지 한 사람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역으로 보수의 신중함이 가치가 있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니까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자유시장'에 맡긴다. 나쁜 점은 불완전함을 감추고 오히려 자유시장에 맡기는 것을 만병통치약으로 광고하는 일이지.

 

이야기가 다소 새어버린 듯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제의식도 이와 맥락이 맞닿아있다. 혼란과 고통으로 가득 찬 당시의 러시아 사회에서, 휴머니즘의 탈출구를 절실하게 찾았던 사람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니까. 적어도 나는 그의 작품을 그렇게 이해한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기대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휴머니즘이다. 나는 여전히 종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끝에서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종교적으로 표출하는 장면들에선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사실 '죄와 벌'을 다시 잡은 것도 마지막에 로지온 로마노비치가 대지에 무릎 끓고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고.

 

인간은 결코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죄는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겠지.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니까 함부로 이상적인 사회를 꿈꿀 수는 없다. 꿈꾸는 건 좋지만, 그걸 정말 실천하려 한다면 조심해야 한다. 커다란 공상일 수록 그것이 왜곡되면 큰 피해를 끼치니까. 하지만 아무리 어둡고 비관적인 생각에 빠진다 해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거고 그것을 고치는 일은 가치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의 목록이 수십억 가지라면, 적어도 1~2가지는 목록에서 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걸 바랄 수는 없다. 다른 항목은 뒤의 세대의 사람들이 줄여주겠지 하고 믿는 수밖에.

 

그러니까 아무리 인간이 최악의 존재라 해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지 않을까? 살인이라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최악의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서 다시 한번 휴머니즘을 찾으려 하는 '죄와 벌'에 손이 간 것은 나의 이러한 버둥거림의 발로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새삼 느낀 점은 작품의 주제 이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섬뜩하리만치 뛰어난 문장력이었다. 인간의 모순적인 심리와 행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의 글에 중간 중간 몇번이나 감탄했었던가. 내가 아는 한 친구는 가끔 소설을 읽을 때 '묘사하는 것을 머리 속에 그리는 일이 피곤하다'고 했는데, 나 역시 이 말에 많이 동감하는 바이다. 특히 뛰어난 고전들 일수록 한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느라고 글이 장황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죄와 벌'도 마찬가지다. 불과 며칠 동안 일어난 일 - 아마 일주일도 안 된다 - 을 가지고 60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을 썼으니까.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주인공이 거리의 풍경을 보면서 하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몇 페이지의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생각의 족적은 이상하기 그지 없다. 그저 풍경을 묘사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가족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시 배고픈 것을 떠올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싶더니 사소한 생각 하나로 다시 기운이 솟는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당연한 양상이다. 우리 자신만 하더라도 삶의 작은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상념과 생각에 빠지는가. 다만 놀라운 점은 이런 묘사가 시시콜콜한 잡소리로 보이지 않고, 눈 앞에 고뇌에 찬 인간이 보이는 듯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대가의 무서움에 무릎을 끓고 경외를 보낸다. 어쩌면 이렇게 모순적인 사람의 모습을 글로 담아낼 수 있는지.

 

지금도 기분이 묘하다. 솔직히 말해서 슬픈 장면이 너무나 많다. 편하게 사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지독하게 울부짖는다. 어제는 '죄와 벌'에 나오는 미친 여자의 하소연을 듣는 꿈을 꾸었을 정도다. 그것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기쁘다. 하지만 어딘가 슬픈 기쁨이다. 그래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남아있다. 이 묘한 감정에서 빠져나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 하다.

by 핀투리키오 | 2007/03/13 21:17 | 트랙백 | 덧글(3)

트랙백 주소 : http://leoford.egloos.com/tb/319546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누들 at 2007/03/13 23:10
으음.. 꼭 한번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토니로보 at 2007/03/13 23:47
읽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유명한 작품으로 아는....읽어본다 읽어본다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오늘도 게임패드를 쥐고있는 저입니다;;
Commented by 핀투리키오 at 2007/03/20 20:57
누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팬이 되었어요.;;

토니로보// 아무래도 꽤 두껍고 글도 빽빽한 책이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도 시간 내서 틈틈이 읽다보면 어느새 다 읽게 됩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