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8월 06일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처음엔 당황했다. 너무나 일방적인 단절로 끝난 이야기에. 처음과 같이 눈처럼 휘날리는 벚꽃잎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서로 사랑했던 두사람은 온데 간데 없었다. 타카기와 아카리의 재회를 기대했던 마음은 애절한 주제가와 화려한 영상미의 취기에서 깨어나는 순간 깨끗이 배반당했다. 두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회하던 모습은 그토록 길고 천천히 그렸으면서, 이어지리라 예상했던 극적인 드라마는 노래가사 몇 마디가 흘러가는 동안 끝나버렸다. 홀로 남은 타카기의 텅 빈 마음처럼, 내 마음도 텅 비었다.

작품 내내 화려하게 화면을 수놓는 빛의 향연은 언제나 그리움과 상실감에 젖어있어서, 수백마디의 말보다도 절절하게 사랑의 애처로움을 전해왔다. '벚꽃초'에서 타카기는 아카리가 기다리는 곳까지 가는데 약 3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3시간.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것만을 고려하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가는 방법도 전차만 계속 갈아 타면 끝일 뿐으로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인 소년에게는 이렇게 먼 여정은 처음이었을 것이고, 혼자서 낯선 장소들을 거쳐 간다는 점은 마치 세계의 끝까지 미지의 항해를 하는 기분이었으리라. '초속5cm'는 주인공의 이런 기분을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눈보라 속에서 외롭게 빛나는 전차의 불빛으로 표현한다. '벚꽃초'에서는 전차의 헤드라이트로, '코스모나우트'에서는 끝없이 펼처진 하늘과 그것을 뚫고 올라가는 우주선의 번쩍임으로, '초속5cm'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의 연속과 주인공의 독백이나 다름 없는 주제가의 어울림으로. 그러므로 탄탄한 이야기가 빠지더라도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과정은 손에 닿을 듯이 느껴진다. 그 과정은 끊임없이 꿈 같은 행복과 쓸쓸한 외로움의 교차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어쩌면 타카기는 아카리가 곁에 있었다 해도 외로움과 허탈감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아카리를 향한 사랑은 그에게 특정 인물에 대한 사랑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하여, 그의 영혼을, 내적 기질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 아닐까? 눈길로 막힌 밤의 철도를 외롭게 헤쳐가는 전차처럼, 끝없는 진공의 공간을 홀로 탐사하는 우주선처럼. 뭔가 순수하고 신비한 비밀을 계속해서 추구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 타카기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비밀이 곧 아카리였으나, 아카리와의 관계가 끊어진 뒤에는 아카리는 비밀의 형상으로서 꿈에 나올 뿐이다.
다시 한 번 아카리와 그랬던 것처럼 순수한 일체감을, 감정의 고양을 느끼고 싶다는 갈망은 타카기를 점점 더 지치게 만든다. 그 갈망은 아카리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현실에선 절대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타카기를 몽상가요, 과거에 얽매인 자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도쿄의 대학에 진학했고, (아마도) 괜찮은 직장을 잡았으며, 3년 동안이나 다른 여자와 교제를 하기도 했다. '코스모나우트'에서 말했듯이 그때 그때 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든 한 것이다.
이는 적어도 타카기가 계속 아카리의 뒷모습을 쫓고 있던 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 사이에 마모된 것은 아카리를 향한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때와 똑같은 체험을 되풀이하고 싶다는 소망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타카기는 아카리가 있던 곳으로 쫓아가지 않는다. 미묘한 미소와 함께, 그는 추억의 장소에서 등을 돌린다.
이 장면이 곧 타카기가 과거를 완전히 극복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앞에도 아카리처럼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남겨둔 결말이다. 비록 과정의 생략으로 인해서 전락한 모습만 나온 타카기이지만, 그 역시 전락을 면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기에 다시 한번 타카기가 누군가의 마음과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완전히 텅빈 마음은 역으로 보면 새로운 관계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터전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새로운 사람과 가까워지더라도, 그는 벚꽃잎이 흩날리는 광경을 볼 때마다 가슴 아파할 것이다. 순수했던 시절, 사랑에 모든 것을 맡겼던 경험은 겨울밤에 전차를 타고 먼 길을 갔던 기억과 엉겨붙어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느끼면서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기회가 온다면....' 이라고 수없이 되뇌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의 노래 소리가 애처롭게 귓가를 맴돈다.

# by | 2007/08/06 22:20 | 트랙백 | 덧글(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좋은 작품이죠... 흑흑
내 기대를 비참하게 잘라먹으면서 재미가 없었던 작품..
다시 보면 재밌을것같지만-_-
ColdWM// 기대 이하였다는 평의 이유는 그거였나? ㅋ 난 어찌저찌 하다 보니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 부분은 상관 없었다네. 하지만 숨막히는 영상미와 분위기만으로도 끔뻑 넘어가는 작품이었는데..
그 영화에서의 내내 느꼈던 답답함과 애절함... 딱 저의 상황이 그렇다 생각되면서
참으로 슬프고 허무한... 뭐라 말로 딱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아무 노래도, 아무 소설도 알려주지 않았던
그런걸 말해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