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과 해방' -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2년 전에 썼던 글. 본문에 수정은 없다. 지금 다시 보면 생각이 다소 바뀐 부분들도 있고, 한번 더 이 책에 대한 글을 쓴다면 논리 전개를 상당히 달리 할 듯 싶다. 특히 의미 구성의 망에 대해선. 그러나 핵심적인 생각은 여전하다. 지식인의 주장은 일상행위자들의(사회의 보통 사람들) 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대신 그것은 좀더 우회적으로, 김경만의 표현대로라면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해서 파급력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데올로기엔 일종의 합리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의 이론은 사회의 최고수준의 정치적 권력을 둘러싼 다툼에서 핵심적인 '씽크탱크'의 역할을 한다.

그람시 말대로,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지만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지식인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여자용 공중화장실을 대거 확충한다는 정책이 발표된 적이 있다. 여성 변기를 남성 변기보다 1.5배 이상 설치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한다는 이야기였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구조 차이상 동일한 공간에 똑같은 수의 변기가 있을 경우 여성쪽이 남성쪽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관이나 역에 설치된 작은 화장실에서 언제나 여자화장실 앞에만 줄이 늘어서 있는 광경을 기억한다면, 이번 일은 여성들이 당해온 부당한 차별을 수정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용 공중화장실의 확충은 호주제 폐지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투쟁 성과를 입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여성이 당하는 부당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두는 일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작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여성만 잘 살고 보자는 편협한 사상' 취급을 받고 있음을 고려하면, 페미니즘이 현재 거두고 있는 제도적 성공은 일반인들의 상식과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페미니즘이 한국의 대중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얻어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까?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기초적인 수준에서나마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통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의무교육내용에는 아예 포함이 안 돼 있고, 배움의 폭이 넓다는 대학에서조차 소수의 교양수업과 몇몇 학생단체들의 교양세미나를 제외하면 페미니즘을 알기란 힘들다. 또한 내 작은 경험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데, 내가 아는 여자후배에 따르면 그녀의 동성 친구들은 페미니즘에 거의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이 거두고 있는 제도적 성공은 대중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는 무관하게 일부 운동단체의 성공적인 영향력 행사의 결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페미니즘의 지지자들에겐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의 보통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부당한 성차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런 가정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젠더', '성적 정체성', '가부장제' 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 - 페미니즘 이론의 맥락에 기반한 - 가 결여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투쟁은 일정 부분 성과를 내고 있다.  

 

이 기묘한 간극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일정한 제도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을 통해서 성적 해방을 추구하던 페미니즘 운동가 및 지식인들의 노력은 대중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라고 규정되어야 하는가? 이처럼 사회운동에서 언제나 제기되는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김경만이 쓴 도전적인 책, '담론과 해방'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에서 김경만은 서구의 저명한 학자들, 그중에서도 비판이론가로 알려진 부르디외, 기든스, 하버마스의 이론에 중요한 비판을 가한다. 비판이론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상식이나 행위양식의 모순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을 그릇된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이다.

 

김경만에 따르면 이들 비판이론가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모순을 범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경험과 사고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일방적으로 이론을 따르게끔 하는 독선을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판이론가들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주려 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론이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로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한 고도로 복잡한 추상적 개념들 때문에, 정작 비판이론가들이 이해하고 해방시키고자 했던 보통사람들은 비판이론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비판이론가들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인 '비판이론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비판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사람들이 수용하게끔 하는 방법은 자신들의 이론에 특권 - 이 이론은 보통사람들이 알 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다는 - 을 부여하는 것밖에 없다. 비판이론가들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과 사람들이 스스로 해방을 추구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외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이론에서 보통사람들이 나설 자리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김경만이 보통사람들에 대한 지식인의 특권을 강하게 부정하는 부분에서 그의 인식론이 잘 드러난다. 김경만은 지식인의 인식 능력이 보통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단지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호작용과 그 결과물들은 바로 그 상호작용의 당사자인 사회구성원들이 자신들의 행위와 사고방식에 대해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들의 망을 '구성'함으로써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구성된 의미의 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지식인들만이 이로부터 벗어나 '객관적인(보편적인' 제3자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오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들이 사회와 자신을 파악하는 이론 혹은 상식과 마찬가지로 지식인들의 이론도 세상을 '구성하는 단지 또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비트켄슈타인식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사회'를 구성하는, 그리고 우리 자신들을 구성하는 거대한 언어게임의 수행자이다. 지식인만이 언어게임에서 벗어나 언어게임 자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김경만의 이러한 주장은 소위 진보적 주장이 맞닥뜨리는 난감한 문제들을 예리하게 폭로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의 시작을 열었던 페미니즘도 사실상 비판이론과 똑같은 목적을 공유한다. 그러나 정작 페미니즘이 해방시키려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주장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령 연고전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대한 반응이 그렇다. 이 연고전은 주로 남자들만이 뛰는 스포츠가 행사의 중심인데, 여기서 여자학우들은 구경꾼에 머문다. 이것이 연고전이 여성을 소외시키고 남성위주의 행사라는 비판에 대해, 고대에 다니는 내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바로 그 여자애들이 스스로 고연전을 즐긴다.'고. 연고전을 즐기는 여학생들에게 페미니즘 운동가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설령 말을 잘 한다 해도, 그 말을 들은 여학생들이 '자신들은 소외되어 있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할 근거가 있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지식인에 대한 고전적인, 그리고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즉,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지식인이 소외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선도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이 전통을 가장 강력하게 부활시킨 인물은 '맑스'일 것이다. 그의 유명한 테제,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는 지식인이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의 일익을 담당해야 함을 뜻하는 대표적인 문구이다. 이것에 대한 '담론과 해방'의 답은 비관적이다. 지식인이 소외된 계층의 이해관계를 객관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앞서 지적했듯이 근거없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비판이론가들은 이 모순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지적이다. 그리하여 김경만은 지식인들의 관심사와 이론은 어디까지나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만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며, 그것이 사회일반에 영향을 미칠 때는 '이론'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이제 '사회의 변혁자'라는 역할을 포기하고 단순한 '해석자'의 지위에 만족하면 되는가? 비판적 지식인은 어디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는가? 나는 (이런 표현이 맞다면) '사회적 의미 구성의 망'에 모든 사람들이 행위자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준거적 관점이 극단적인 주관주의로 흐르지 않게 만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구속력의 존재한다는 김경만의 전제들 자체가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을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김경만의 말대로 우리는 사회학 이론이 특별히 우월한 '진리'가 아닌, 사회적 행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학자가 '구성한' 사실이란 점을 인정할 수 있다. 확실히 인간을 다루는 모든 학문은 자연과학과 달리 불확실한 인간의 행위에 의미부여를 해야하며, 이 과정에서 연구자 또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미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 내부에서는 어떤 우월한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효과에 직면한다. 김경만이 말했듯이 사회구성원 하나하나가 추구했던 연애결혼은 한국사회에서 이혼율 증가, 버려지는 아이들의 증가와 같은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만들었다. 또 각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는 노력은 학벌의 강화와 사교육 경쟁의 가열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낳았다. 분명이 이 모든 의도하지 않은 효과에 대해 보통사람들 -김경만의 표현대로라면 일상행위자들은 나름대로 실상을 파악하고 대응에 나선다. 사람들은 성급한 이혼을 막기 위해 연애기간을 늘이거나, 학벌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만의 재능을 살리기 위한 진로를 진지하게 모색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응에 무조건 확신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의도하지 않은 효과, 뒤르켐이라면 '사회적 사실'이라고 할 이것은 개개인이 그 영향력과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한 경우가 많다. 더욱이 김경만 스스로 밝혔듯이 사회에는 특별히 진실성에 있어서 우월하다는 특권을 보장받는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에 완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없듯이, 주위 사람들의 말도 불안해하는 그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여기서 그가 의지하는 대상이 그보다 정확한 지식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지식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지식인의 이론이 일상행위자들의 이론 혹은 사고방식보다 실제로 우월하냐의 여부가 아니라,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지위가 만들어내는 신뢰감이다.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지만,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지식인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로 지식인의 이론을 간단하게 정리하거나 응용한 교양서적에 대한 수요, 언론에서 흔히 등장하는 지식인의 말의 인용, 유명한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대우 같은 부분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일상행위자들의 신뢰성 있는 지식에 대한 요구가 한 사회의 핵심적인 권력투쟁에 미치는 영향이다. 한 사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권력, 즉 정치권력을 잡으려는 집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들을 지지해줄 집단이다. 그리고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동원의 역할을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란 신념체계로서 일상행위자들로 하여금 불확실한 선택지들 가운데서 특정한 선택이 믿음직하다고 설득하는 기능을 한다. 다만 종교 교리와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점은, 종교는 순수한 믿음이면 충분하지만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는 합리성 또한 갖춰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치권력은 그 사회의 재화를 분배하는 작용을 하므로, 정치권력의 선택에 있어서 일상행위자들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계산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는 지식을 무기로 삼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김경만이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만 열광적인 에너지를 창출한다고 말했던 '이론 간의 투쟁' 결과는 정치권력의 배경이 된다. 각각의 정치집단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이론들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높다고 알려진 것을 배경지식으로 활용한다. 쉽게 말해 각 정당의 두뇌집단들, 연구집단들이 이 역할을 한다. 이들이 만든 정책은 최대한 간단한 구호나 선전문구로 변하여 이데올로기와 결합한다. 일상행위자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을 접하고, 이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것을 선택한다. 이 경우 선택된 이데올로기에 포함되어 있는 지식은 제도나 법으로 만들어져 일상행위자들의 삶(생활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국제정치학의 신기능주의 이론의 반영이었고, 노무현정부가 적극적으로 FTA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현대경제학의 주류인 신고전파경제학 이론이 있다.

 

결국 지식인 사회 - 김경만이 대리적 사고공간이라 부른 - 에서 만들어진 이론은 언제나 일상행위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물론 모든 이론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권력에 의해서 이데올로기의 배경으로 선택된 이론이 그렇다.) 여기서 고려해야만 하는 반론은 이러한 이론의 영향력이 정말로 '이론'의 영향력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점이다. 이미 김경만은 책의 부록에서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이 맑스의 이론을 수용한 것은 '이론적 이해'와 무관한 이데올로기적 필요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김경만의 논리는 중요한 모순, 혹은 모호한 점을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경만은 일상행위자들의 행위와 판단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 의미부여를 통해 획득한 이들의 지식은 똑같이 '구성된 것'이란 점에서 지식인들의 이론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단순히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도 일상행위자들의 지식은 대상의 파악과 예측에 있어서 지식인들의 이론에게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일상행위자들의 지식 또한 '이론'으로까지 불린다.(170p) 김경만의 이 같은 주장은 '이론이란 어떤 대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모든 개념의 망'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확실히 이러한 이론 개념 하에서는 그람시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모든 일상행위자들의 지식이 기본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다면, 즉 이론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면, 어째서 유독 맑스의 이론을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이론'만이 '이론적 이해'를 결여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김경만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일상행위자들은 사회적 의미의 망 속에서 자신들의 '이해관심'에 따라 특정 이론을 만들거나 선택하거나 활용한다. 김경만은 이들이 맑스 이론의 핵심인 가치론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당시 운동권에게 그러한 이해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파악할 이론적 틀과 운동의 동력이 되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가치론에 대한 수학적 이해는 이런 요구와 관련이 없었다. 개념의 정확성이 이론의 뼈대가 되는 지식인 사회와 달리, 실용성이 중시되는 생활세계에서는 김경만의 논리대로라면 당시 운동권은 훌륭한 '이론'을 갖고 있던 셈이다. 아니면 김경만은 지식인의 이론을 빌리지 않은 순수한 일상행위자의 지식만을 '일생행위자의 이론'으로 인정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그의 이론 개념과 일상행위자의 지식에 대한 인식론적 평가는 그러한 구별을 담고 있지 않다.

 

결국 김경만은 지식인의 이론이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 통용되는 의미 그대로 일상행위자들에게 수용되어야만 '이론이 일상행위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앞선 운동권의 사례에서 보듯 맑스의 이론은 지식인들이 이해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론으로서 작용했고, 이것은 일상행위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똑같은 맥락에서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에 담긴 지식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일상행위자들의 선택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지식인의 이론과 연결된다. 이 연결은 해당 지식이 실제로 입법되고 제도화됨에 따라 다시금 일상행위자들의 사회적 환경을 재구성하며, 일상행위자들은 이것의 결과를 다음 정치권력의 선택에 반영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의도되지 않은 효과들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자극하며, 그 결과 만들어진 이론은 교양이나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다시 일상행위자들에게로 흘러간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상행위자들이 이론을 만들고 이용하는 방식이 지식인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둘 사이의 고리를 끊는 게 아니라, 단지 둘이 만나기 위해서는 복잡한 중간단계를 거쳐야 함을 의미할 뿐이다. 그 복잡한 단계란 지식인의 이론이 실용적 관심에 맞게 재단되는 과정 혹은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로 변하는 과정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식인 또한 일상행위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의미 구성의 망 속에 들어있으므로 이론의 객관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인식론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지식인이 객관적인 이론의 생산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사실로 바뀐다. 다음으로 지식인의 추상적인 이론이 일상행위자에게 수용될 때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는 지적은 그것이 김경만 자신이 주장한 일상행위자들의 이론의 일부임을 고려할 때 큰 의미가 없어진다. 분명히 지식인 사회와 일상행위자들의 생활세계는 다른 원리로 운영되지만, 일상행위자들은 교양의 형태든 이데올로기의 형태든 지식인들이 생산한 이론을 자신들의 이해관심에 맞게 수용하거나 변형하여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럼 애당초 문제제기의 핵심이었던 '비판적 지식인의 존재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 답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자연히 나온다. 결국 지식인의 이론은 일상행위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 원천은 일상행위자들의 이해관심과 그것이 빚어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곧 사회적 사실이다. 여기에는 소외계층의 존재와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도 포함된다. 굳이 소외계층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의 모순 - 가령 획일적인 입시교육, 환경문제 등 - 은 언제나 존재한다. 따라서 이 모순들에 관심을 갖고 이것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사회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영향을 획득하려 하는 한, 이러한 운동을 교양지식 및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지원할 수 있는 관련지식의 생산자인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수요는 계속 될 것이다. 지식인들은 앞으로도 자신들이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만 한다.

 

 

 

보태기 : 그렇다고 해서 김경만의 지적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학자는 무엇보다도 '이론'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의무를 경시한 채 사회적 역할 운운 하는 것은 주객전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의 사회과학계는 엄밀한 이론적 연구가 부족하다. 대학교 4년을 다니며 느낀 것은 커리큘럼 가운데 학과 공부의 밑바탕이 되는 이론을 탄탄하게 다져줄 강의를 대단히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특정 부분에 대한 학문도 좋지만, 그전에 해당 전공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을 가다듬어 줄 이론 강의가 절실하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쓴 비판과 나름의 설명은 대단히 조악한 것이다. ㅡ_ㅡ;; 일단 일상행위자와 지식인 사회, 정치권력의 관계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사회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그외에도 대부분의 내 주장은 엄밀한 개념 정의나 역사적, 경험적 사례의 뒷받침이 부족하며, 논리적으로도 치밀하지 못하다. 사실 김경만의 다른 책도 좀 읽어보고 관련 서적도 뒤적이며 며칠 동안 고민하면서 쓰고 싶었다. 하필 군대 갈 시간이 다가와서야 학구열에 타오르다니, 그만큼 무식한 채로 군대 가는 게 싫다는 마음의 반증인가. ㅡㅡa 하지만 엉터리 글이라도 써놓는 것이 나중에 바로 잡을 때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일단 이것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담론과 해방', 정말로 멋진 책이었다. 지적 욕구를 인정사정 없이 자극 당하는 쾌감을 오랜만에 맛봤다. 




 

by 핀투리키오 | 2008/09/07 22:56 | 세계를 사유하다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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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라임 at 2008/09/08 02:18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도대체 학문에 비판적 기능이 존재하는가, 는 공부하는 사람들 머리 속에 늘 유령처럼 떠도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김경만을 알았는데, 책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관심이 가네요. 보태신 내용을 보니, 지식인들이 제대로 공부도 안 하고 '계몽적' 태도로 일관하려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데, 확실히 그런 문제의식에는 공감이 갑니다.

한편으론, 미국학계에선 아카데미의 지식을 통해 사회 변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놀랄 만큼 희박하다는 이야기를 미국에서 유학하는 분의 블로그에서 읽은 적도 있어서 미국에서 공부한 저자의 배경이 신경쓰이기도 합니다만^^;

Commented by 핀투리키오 at 2008/09/08 21:56
책의 핵심 주장은 제목에 나와있는 듯 합니다. (저도 읽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_-;) 학자들의 '담론'과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해방'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는 것...해방을 추구하는 이론들은 이 간격부터 설명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죠.

지식인들의 공부 부족에 대해선, 확실히 책에는 그런 주장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특히 한국학계에선 '실천'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오히려 학자의 바탕이 되는 이론을 튼실히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그런 말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한국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좀 공감이 갑니다. 서양 이론의 소개와 개론 수준의 책만 잔뜩 보이고, 진지하게 이론의 뿌리부터 성찰하는 책을 보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반면 미국의 학계 풍토에 대해서도 공감합니다. 미국 사회과학은 '중립성'을 중시하니까요. 아무리 학문에 비판적 기능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학자의 개인적인 선택이지 학문에서 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입장이죠. 적어도 사회학에 있어선, 베버의 '가치중립성'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듯....ㅡㅡ;

개인적으론 사회과학이 사회 변혁과 동떨어져 있기란 매우 힘들다고 보지만요.
Commented by 은하 at 2008/09/08 02:20
실존적 결단과 지식의 관계의 경우 항상 지식이 앞서지는 않은 거 같네요. 김경만 씨의 논지대로라면, 실존적 결단을 하다 막힐 때 지식을 찾아가도록 하게 되니까요. 지식인이 필요한 것은 그에 대한 준비구요. 책도 서평도 멋집니다. 특히 페미니즘 관련 고민은 많이 공감가요.

에고고...근데 제 고민은 제도주의와 촛불정국에서의 고민이에요. 제도정치의 작동원리에 따라 문제해결이 어려운 사회에서는 그 때 그 때 국민이 뛰어나오는 수밖에 답이 없는데, 이런게 오히려 제도정치의 정착을 방해하는걸까. 아니면 제도정치가 정착될 그 어느 날을 믿고 현실에서 기다리기만 해야하는가. 그러고보니 양자를 아우르는 한국현실에 걸맞는 이론이 필요하군요 >ㅅ<
Commented by 핀투리키오 at 2008/09/08 22:10
엄...실존적 결단과 지식은 함께 간다고 생각해요. 단 지식의 형태가 지식인과 일반인들에게 다르게 오는 거죠. 김경만의 경우,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각이 지식인들의 지식과 비교해서 열등할 게 없고, 오히려 사회변혁은 일반인들의 의식에 기초해서 일어난다고 보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의 지식은 너무 추상적이고 복잡해서 일반인들의 관심을 못끌고, 이해를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죠. 결국 사회과학적 지식은 이데올로기로 변해서 전달될 뿐..

하지만 전 김경만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단지, 지식의 실천 형태가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적 지식은 학자가 사용하던 의미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교양이나 언론 기사의 수준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한 채 일반인들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가니까요. 심지어 문화에서도 지식과 예술의 경계를 엄밀히 하기란 어렵죠.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보고 한국 현대사에 대해 비판적 관심을 가진다면, 이때의 결과는 소설의 예술적 효과이면서 소설에 담긴 역사적 지식의 영향이기도 하니까요.

말씀하신 고민은 왠지 알 거 같습니다. 어려운 문제네요. = =; 제도에 대해 접근할 때는 '제도의 양면성'을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는 '강제력을 가진 규칙'이지만,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무엇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라고 여기게 만드는 기제니까요. 후자의 면을 보면 제도정치가 정착될 날을 기다리는 것은 어렵겠죠. 결국 어떤 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그 제도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계속 일깨워 줄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중요한 것은 그 운동을 다시 제도로 정착시켜 줄 수 있는 현실적인 정치세력의 등장과, 그런 정치 세력이 힘을 얻어서 제도정치권 안에 진입하는 일이겠죠. 근데 이것 참 어렵네요. --; 적어도 촛불이 한국정치에서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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