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진심으로 힘들게 한 사람들

며칠 전 상관과 한 판 싸웠다. 원인은 얼마 전부터 - 실은 꽤 오래 전부터 - 계속 있었던 그의 부당한 언행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피해자는 내가 아니라 후배들이었다.

이제 막 열심히 적응하려고 노력 중인 후배들을 격려해주지는 못할 망정 부족한 점만 보고선 '게으른 놈들에게 벌을 줘야겠다' 식이었다.

말로만 늘 '리더와 부하 사이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늘어 놓고 항상 이랬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조금만 어긋나도 짜증내고 윽박지른다.

자기 좋을 대로만 해주기를 원한다면 신뢰 따위 필요없다. 아부와 가식만이 신뢰의 빈 자리를 채울 뿐이다.

이미 내 선배가 이 문제로 상관의 방에서 한 소리 듣고 나왔던 참이었다.
이윽고 그가 나를 호출했다.

난 똑같은 문제로 부른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다른 지시만 하고 나가라 말했다. 나랑 그 문제로 이야기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거기서 그냥 나갔다면 굳이 시끄러워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냥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물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라고.

감정도 싣지 않고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했던 질문. 그런데 질문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만큼 그는 길길이 화를 냈다. 나는 거듭해서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 문제가 무엇이며 더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할뿐임을 말했다. 모두 헛수고였다. 말할 때마다 그는 스스로 역정을 내면서 건방지게 자신을 무시하냐는 듯 소리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감정은 차분했다. 매우 불쾌한 순간이었지만 어차피 예상한 일이었고, 더 이상 그에게 실망할 정도로 기대했던 것도 없었다. 그래서 괴성이 클라이막스에 달했을 때 오히려 내 마음은 얼어붙은 바다처럼 냉정했다. 그대로 그렇게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내 선배가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뒤 나갔다. 그 순간 방금 전까지 가라앉아 있었던 내 감정이 요동쳤다.

얼굴은 갑자기 화끈거리고 콧등은 시큰해지려 했다. 그때 나서준 선배에게 너무나 고마웠고 동시에 그만큼 미안하고 슬펐다. 그분이 책임질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제 곧 그 선배는 떠날 사람이므로 이 일과 관여함으로써 괜히 피해를 볼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선배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 힘들었다. 이미 터진 감정의 둑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선배를 볼 수 없어서 일하고 있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하던 일을 이어서 하는 척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는 것 까진 아니라도 뭔가 좀 흘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한 판 하고 나온 걸 모두가 아는데, 거기서 그런다면 혼나서 훌쩍거리는 모습 밖에 더 되겠는가. 그것만은 부끄러워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꾹 참고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들기는 시늉을 했다. 근데 왜 이 선배는 계속 신경 쓸 거 없다고 모두를 위로해주는지.

덕분에 감정의 물결은 더 거세져서  '괜찮아요'라고 한 마디를 하려는데 목이 메이는 것이다. 이대로 말했다가는 분명히 들킨다. 그래서 꾹 참았다. 태연한 척 말하는 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가.
 
그날 나를 정말 힘들게 한 사람은 상관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난 애당초 그에게 거의 인간적인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좋은 일만 해주고 싶다. 그래서 역으로 힘들게 만들면 괴롭다. 그때만큼 나의 무력함을 탓할 때도 없다.

나쁜 사람들, 인간적으로 부족한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 할 필요는 없다. 그들 때문에 괜히 분노해서 나만 힘들 필요도 없다. 하물며 그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대신 나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기뻐하고 슬퍼하며 때때로 화도 내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상관 덕분에 고마운 사람이 옆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힘든 일이야말로 소중한 교훈을 준다. 나는 긍정적인 면에 주목하며 나쁜 것들을 극복해내야겠다. 고난이 닥칠수록 이점을 명심하자.

 



by 핀투리키오 | 2009/06/12 23:57 | 나의 세계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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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든(디온) at 2009/06/13 09:36
하아. 군대 참.....
별의별 인간군상의 바닥까지 보고 왔다는 점에서, 참 겪기 힘들지만 두번은 가기 싫은 곳이네요.
Commented by 핀투리키오 at 2009/06/15 23:00
이러니 저러니 추억도 많지만, 말 그대로 괴로운 기분이 희석되고 좋은 느낌만 남아서 추억이지 다시는 오고 싶지 않네요. ㅡㅡㅋ

하기사 글에서 쓴 상관 같은 사람들은 사회에도 부지기수일테니 군대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이번 기회에 '나는 저러지 말자'란 소중한 교훈을 또 배웠으니 고마워해야 할까요? ㅎㅎ
Commented by 토니로보 at 2009/06/15 23:38
사회생활도 그렇지만 군대는 특히나 이런것에 민감하죠
분명 잘못된것이지만 그것을 나에게 언급하는것이 더욱 잘못된것이라 생각하는
윗사람이 있으면 여러모로 피곤...ㅡㅜ 힘내시길
Commented by 핀투리키오 at 2009/06/17 22:46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힘내야죠.

그래도 마음 속에 불편한 느낌은 남아있지만...

어서 떨쳐내는 것만이 답이겠죠? ㅎㅎ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불련 at 2009/07/28 23:50
정말 군대에서 상관을 잘못만나면 괴롭죠 =_=;;
근데 전 간부층들은 그나마 같이 술도 마시고 해서 덜할줄알았는데 꽤 심하군요..;;
Commented by 핀투리키오 at 2009/07/30 23:29
간부들도 집단이고 계급도 다 나뉘어 있어서 심하죠. 자기들만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사회가 있는 곳엔 어디나 갈등이 있죠..특히 이런 엄격한 계급사회(군대 말하는 겁니다;)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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